폭력 선생에 관한 기억
Who I am 2013. 2. 1. 13:15 |폭력 선생에 관한 기억
최근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왕따’와 ‘이지메’가 자주 뉴스가 되다 보니 저녁에 아내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참 하게 되었다. 요즈음의 ‘왕따’나 ‘이지메’ 만큼 과격하지는 않았지만 80년대에도 90년대에도 그것이 없지는 않았었다. 서로의 학창시절에 대해서 대화를 하다 보니 ‘왕따’가 아닌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학교 생활, 학창시절에 계속 존재해 왔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비슷한, 고만고만한 구성원들이 아닌 절대적인 존재, 선생님이 항상 그 곳에 있었다. 특히나 ‘담임’ 선생님.
수십 년이나 지난 지금, 그 어느 선생님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나의 국민학교 4학년 담임선생을 제외하고는. 지나친 폭력과 비뚤어진 성격으로 차별과 폭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해 주었던 그 사람. 30년이 지나도록 그 이름 석자도 절대 잊지 못하게 만든 그 사람.
세상이란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아직 잘 모르던 10살 꼬마들에게 ‘촌지’와 ‘폭력’의 함수 관계를 알려준 그 사람. 같은 반 친구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억지로 인지시키고 깊은 감정의 골을 파준 바로 그 사람. 똑같이 숙제를 안 해와도 못 산다는 이유로 수십 대를 더 때리던 그 사람.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왕따를 지휘하던 그 사람. 부모님들께 뻔뻔하게 거짓말 하던 그 사람. 없는 살림을 짜낸 어머니가 촌지 봉투를 건네면 열흘 동안은 절대 때리지 않던 그 사람.
나는 자타가 공인하던 ‘매우 얌전한’ 아이였다. 겁도 많은 편이어서 심한 장난도 치지 못했고 키도 작아 첫째 줄 교탁 바로 밑에 턱 받히고 앉아 어떻게 하면 선생님께 칭찬 받을까를 주로 생각하던 그런 아이였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더 많이 맞은 편도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4학년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그나마 내가 가장 미움 받는 ‘단골’이 아니라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느낄 정도로 변했고 다시는 그 어떤 선생님을 존경하거나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게 되었다. 1984년은 내 인생 최악의 시기, 지옥 그 자체였다.
‘단골’이었던 아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집이 가난하던 아이였다. 그 친구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십 대의 매를 맞았다. 그 사람이 ‘단골’아이를 빗자루로 때리며 외치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너도 너네 부모처럼 똥치고 농사나 지어라 병신새끼’.
수업시간은 6.25 전쟁 중 수류탄 까 던지고 다 쏴 죽이고 공산당 개새끼들, 하는 내용으로 바뀌기 일쑤였고 가끔 보다 못했는지 부잣집 아들 반장 녀석이 수업하자면 “어, 그래. 너무 샜구나”하고 수업으로 돌아오곤 했다. 단지 딱 한번, 공부는 잘 했지만 못사는 집 녀석이 흉내 내서 수업하자고 그랬다가 “너 같은 새끼가 빨갱이 공산당 새끼”라고 남은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교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패고 패고 걷어 차고 때리고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팼다. 오장풍이던가. 갑자기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던 패륜 선생. ‘선생’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아무런 추가적 의미가 없는 직업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 사회에 알려 준 그 오장풍 동영상을 봤을 때도 그 일을 떠올렸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10살짜리 아이들을 서슴지 않고 ‘빨갱이 간나새끼’로 몰아 붙였다. 아이들은 눈에 띄게 변해갔다. 눈치보고 아부하고 알아서 기고 알아서 바치고 서로 서로 일러바치고. 그 사람은 10살짜리 아이들을 사회에 찌든 몸집만 작은 어른들로 바꾸어 놓았다.
내게는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의 이름을 Google에서 검색해 봤다. 인터넷은커녕 컴퓨터조차 생소하던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그런지 검색 건수는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결과 하나가 내 눈을 끌었다. 어느 조악한 오래된 게시판에 누군가가 올린, 자신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글이었다.
6.25 참전 국군장교, 상이군인, 상처에 대한 묘사도 인상착의도 이름도 같고. 그의 경력, 특징이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많이 맞았다’는 내용. 그 사람이 분명했다. 놀랍게도 글을 쓰신 분은 4.19혁명이 일어난 이듬 해에 그 사람을 담임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1961년에 국민학교 4학년. 나는 1984년에 국민학교 4학년 때 그 사람을 담임으로 두고 졸업할 때까지 학교 내에서 멀리 보이기만 해도 도망가거나 숨었으니 적어도 25년 이상 그 사람은 초등학생들과 학부모들을 상대로 촌지를 뜯어내고 이유조차 명확하지 않은 무자비한 폭력을 계속 휘두르고 있었다는 뜻이다. 절대 선생이 되어서는 안됐을 사람이. 한 반에 60명이 당연하던 시절이니 25년간 적어도 1,500명의 어린이들은 크건 작건 나처럼, 1961년에 그 사람을 경험한 이름 모를 그 분처럼,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떠오른 그 이름 때문에, 30년이나 된 그 기억 때문에 어제 저녁부터 하루 지난 저녁인 지금까지, 불쾌한 감정이 하루 이상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풀어서 써 놓고 당분간 또 잊고 살고 싶다. 그 사람, 당시에도 나이가 많은 편이니 이미 죽어서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만 나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덧붙임>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셔서 Daum View 베스트 1위가 되었군요.
비슷한 경험, 비슷한 고통을 받은 기억을 가진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의 '교육'이 다시 바로 서길 바랍니다.
바로 선 교육으로 나라가 바로 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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